요한복음 1장 9-18절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7 viewsNotes
Transcript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요한복음 1장 9절부터 18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9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142페이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님들은 참 훌륭한 분들이십니다. 좌우 앞뒤로 인사하겠습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어느덧 매일성경으로 큐티를 시작한지 50일이 지났습니다. 벌써 두달이 지나갑니다. 다음주에 큐티책을 새로 구매해야 할 정도로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우리 광명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아가자고 하였는데 3가지를 기억하시나요?ㅎㅎ
말씀공동체, 기도공동체, 예배공동체입니다. 셋 중에 하나만 해도 잘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셋 다 이룰 수 있다면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이 우리교회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한번더 인사합시다. “생각해 보니 더 훌륭하십니다.”
* 본문으로
요한복음을 크게 나누면 4, 5부분으로 나눕니다. 바로 그 첫 번째 부분이 1장 1절부터 18절까지를 나누는데요. 이 부분을 흔히 서시, 찬양시라고 성경학자는 말합니다.
그 핵심구절이 14절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요한이 담고자 한 이 찬양의 내용은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셨다. 그 구원의 일을 찬양한다라는 메시지를 서두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시를 두 군데로 나눈다면 1~8절을 한 덩어리, 또한 9~18절을 한 덩어리로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세상을 향한 말씀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은 교회를 향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교회(우리)를 향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찾아보고 그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은 세상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분이시라구요? 하나님은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인하여 어둠을 밝히시는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이 세상을 비추시며, 또한 어두움 가운데 있는 그 백성에게 참 빛을 비추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을 비춥니다. 왜요? 빛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그 백성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 빛이 누구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빛을 떠나서 그 백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존재에게 바로 빛이 찾아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었습니다.
10절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각 사람에게 비추었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였고, 자기 백성도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이상황을 요약하면...
이 빛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밝혀주려 빛으로 오신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존재. 피조물로써 세상 가운데 빚어지고 보냄받은 존재가...심지어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며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오셨음에도...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 모습이 오늘 말씀의 상황입니다.(새벽본문- 마가복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참 빛을 보내주셨음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빛을 세상에, 그리고 그 백성에게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그 빛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그 빛이 우리를 통하여 한국교회와 열방에 비추시기를 기대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결코 그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여겨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빛을 비추시는 분이 누구시라구요? 참된 빛이 누구시라구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구요? 그 분의 자녀를 알고 기억하여 자녀 삼아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돈이 많아서, 인정받아서, 똑똑해서 삼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자녀 삼아주시는지 12절에 기록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특별히 두 단어를 눈여겨 보고자 합니다.
먼저 권세라는 단어입니다. 권세는 아랫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 계시는 분께서 법률적으로 힘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영접하는 자에게 자녀가 되는 힘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셨나요. 바로 영접하는 자입니다.
11, 12절에 두 번이나 기록되는 영접이라는 단어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receive(받다, 받아들이다)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배구에서도 공이 오면 받아주는 것을 리시브라고 합니다. 택배가 집에 올 때 문을 열어주는 것, 청소년들이 치킨이나 피자가 배달오면 반기며 문을 열어주는 의미를 영접의 사전적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영접의 의미는 형태적인 것보다 깊은 관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자어가 더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영:맞을 영
접:이을 접
영어가 맞이하는 것에 그친다라고 하면, 영접이라는 뜻은 맞이하여 잇다, 접하다, 관계를 하다로 볼 수 있습니다. 영접이라는 것은 단지 문을 열고 택배를 받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영접이라는 단어는 문을 열고 그 사람을 맞이하여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 영접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구원파가 말하는 일회적 단회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 빛을 맞이하여 받아들이는 자에게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하나님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은혜를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우리의 마음문을 열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마음에 모시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하고 12,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 육정과 같은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사람의 뜻으로 가질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이 때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혈통으로 난 자에게서가 아니라는 거에요.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자 그 분에게 접붙인 자가 가지는 특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유년부 설교 할 때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종종 사용합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둘 것인가??? 이러한 게임을 종종 합니다.
치킨을 먹을 것인가? 피자를 먹을 것인가? 하나, 둘, 셋!
휴가는 제주도로 가겠습니까? 해외로 가겠습니까?
(스마트폰, 예수님) (돈, 예수님) (휴식, 교회) (섬김, 대접)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을 마음에 두느냐에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눅 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런데 어디에 접붙여져 살아가시길 원하십니까?
참 빛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그 빛으로 자녀삼아 주셨건만,,,자녀라고 고백하는 내가 물질이나 명예, 광명교회의 부흥, 사람으로써의 인정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기대는 아닌가 돌아보았습니다. 저 또한 말씀을 준비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결단한 것은 “주님,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생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불쌍한 자신입니다. 주님 내 안에 주님만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채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믿으십니까?(가슴에 손을 얹어봅시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무엇이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자녀라고 고백하는 우리 안에 빛이 가득하십니까? 나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빛으로 충만한 성도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녀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와 함께 하신다구요?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거하는 분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 갑니다. 띵동, 아빠야 문열어줘.
제가 분명히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띵동 누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사랑하는 제 자녀가 그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며 하는 행동입니다.
띵동, 띵동, 안에 인기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어떨까요? 이런 콱,,,문을 발로 차버려???야!!하고 소리를 칠까요???
띵동,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반겨주기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죠.
마치 제가 저희 자녀들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로고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접하는 자녀와 함께 거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다는 말은 장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즉 거하신다는 것은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어서 인간 속에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가장 밀착한 방식으로 임마누엘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도 동일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거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살게 하시려고 말씀으로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성경과 설교로, 또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시는 일을 통해서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도 빛으로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해 가는 곳마다 어둠이 적발되고, 생명의 길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믿고, 어둠의 거절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간직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내 인생은 내 것이니 관여하시지 말라고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저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당신의 소유입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 왕이 되십시오. 제 주인이 되십시오. 제 어둠을 진리의 빛으로 사르시고, 저를 빛의 도구로 삼아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리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분이시라구요.
첫째, 세상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우리를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나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도 그 빛의 도구로 세상을 비추며,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